복합 위기에 흔들리는 글로벌 공급망
글로벌 경제가 지난 수십 년간 안정적으로 성장해온 배경에는 효율적인 공급망 체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이 체계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시작된 병목현상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는 기후 재난, 지정학적 갈등, 보호무역 강화, 그리고 국제 규제 변화가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공급망 전반에 새로운 리스크를 형성하고 있다.
과거에는 단일 요인으로 인해 발생했던 위기가 이제는 다층적, 동시다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 지역의 이상기후가 농산물 수출에 영향을 미치고, 그 여파는 물류 지연과 식량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정치적 제재가 더해지면 특정 품목에 대한 수출입이 완전히 중단되며, 전체 산업 체계가 흔들린다. 기업들은 더 이상 비용 절감만을 고려해 글로벌 소싱을 계획할 수 없는 시대에 진입한 셈이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희소금속, 식량 등 핵심 품목에 대한 공급망 불확실성은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는 이슈가 되었다. 이에 따라 주요 국가들은 리쇼어링, 프렌드쇼어링, 공급망 다변화 정책을 강화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책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렵고, 오히려 글로벌 생산비 상승과 가격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공급망 위기의 주요 원인을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향후 기업과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전략적 방향성을 짚어본다.
1. 기후 리스크가 끊는 원자재 공급 사슬
기후 위기는 이제 환경 이슈를 넘어 산업 공급망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 특히 농업, 에너지, 광물 분야에서는 기후 이상현상에 따른 생산 차질이 연쇄적인 파장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호주와 브라질의 가뭄은 밀과 콩 생산량을 급감시켰고, 이는 글로벌 식량 공급의 불안을 야기했다. 한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폭우로 인해 리튬 생산이 일시 중단되면서 전기차 배터리 산업 전반에 큰 충격을 준 사례도 있다.
더욱이 이러한 기후 리스크는 단순히 생산량 감소로 끝나지 않는다. 항만, 물류, 저장 시설 등 인프라가 자연재해에 노출되면서 운송 지연이 일상화되고 있다. 태풍, 산불, 홍수 등은 단일 지역의 문제가 아닌 글로벌 공급 일정 전체를 왜곡시킬 수 있다. 이에 따라 많은 기업이 재고 전략을 재검토하고 있으며, '저스트 인 타임' 모델에서 벗어나 '저스트 인 케이스' 전략으로 전환하는 추세다.
기후 리스크는 또한 ESG 기준 강화와 연결되어 기업의 공급망 선택에 새로운 제약을 부여한다. 탄소 배출량이 높은 제조국과의 거래는 ESG 평가지표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며, 이는 중장기적으로 브랜드 가치와 투자 유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기업들은 이제 생산 효율성과 함께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한 공급망을 구축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2. 지정학적 갈등이 야기한 글로벌 분절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지정학이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에너지 수출국인 러시아가 제재 대상이 되면서 유럽은 천연가스 수급 불안에 시달렸고, 대체 에너지 확보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야 했다. 이는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며 전 산업군에 영향을 미쳤다. 반면 러시아에 의존하던 비료, 곡물, 희소금속 수입도 차질을 빚으며 농업과 전자부품 산업의 생산성과도 직결되었다.
또한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은 반도체, AI, 클라우드 등 첨단 산업의 공급망에 심각한 갈등 구조를 낳고 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수출을 제한하고 있으며, 이에 맞서 중국은 희토류 수출 제한을 시사했다. 이런 대립은 공급망의 중립성과 안정성을 훼손하고 있으며, 기업들이 양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디커플링(decoupling)'의 시대를 가속화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중동 지역의 불안, 아프리카 내전, 남미의 정치 불안 등이 더해지며 일부 광물·농산물 생산국의 공급도 불안정해지고 있다. 지정학은 더 이상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인 경제 시스템을 위협하는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3. 무역 규제와 보호주의가 낳는 시스템 불안
글로벌 공급망은 본질적으로 자유무역 체계를 전제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 WTO를 비롯한 국제 무역 질서가 약화되고, 각국이 자국산업 보호를 위한 관세 장벽과 보조금 정책을 강화하면서 공급망에 심각한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EU의 CBAM(탄소국경세), 중국의 수출통제 등은 특정 산업이나 기술에 대해 사실상 자국 중심의 공급 체계를 형성하려는 전략이다. 이는 공급망의 폐쇄성과 이중 표준 문제를 야기하며, 협력보다는 경쟁을 부추기는 구조를 강화하고 있다. 또한 공급처가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국가에 제한되다 보니 원가 상승과 품질 저하라는 이중 리스크도 따라붙는다.
이처럼 무역 장벽이 강화될수록 글로벌 공급망의 탄력성과 예측 가능성은 낮아진다. 특히 중소기업이나 후발국 기업은 이러한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고, 글로벌 시장 진입 장벽이 더욱 높아지는 결과를 낳는다. 중장기적으로는 글로벌 무역 성장률 자체가 둔화되며 세계 경제 전체의 성장 잠재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